정선 갓전병

강원도 정선백복령 정상 터를 닦은 사람들

# 백복령 주막 
해발 740고지 백복령 정상에 음식점들이 모여 있다. 42번 국도가 영동과 영서를 잇는 이곳의 위치는, 정선군 임계면 가목리다. 지금부터 25년 전, 임계와 가목리 주민들은 아무것도 없던 이곳에 직접 터를 닦았다. 처음의 바람은 단순히 농산물직판장을 겸한 토속음식점이 고작이었으나, 지금은 또 하나의 음식문화로 이어질 백복령의 '향토음식 촌'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런데 도로를 가운데 두고 상행 쪽과 하행 쪽에 위치한 이 음식점들은 시작 시기도 동기도 조금은 다른 사연을 가진다. 

정선 갓전병 

정선의 메밀전병은 특별하다. 백복령 향토음식점에서는 갓김치를 다지듯 썰어 양념한 소를 넣어 메밀전병을 만든다. 오직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별함이다. 음식의 맛은 그 지방의 정서와 맥을 같이 한다. 똑같은 재료를 써도 음식을 만드는 이의 손맛이 다 다르듯, 백복령 향토 식당의 전병도 집집마다 미묘한 차이를 지닌다. 고지의 오염되지 않은 바람과 물과 공기의 맛이 느껴지는 정선갓전병은 그래서 더욱 특별하며 다른 지역의 전병과 차별된다. 

주막촌에는 모두 18개의 주막이 백봉령 고갯길 양쪽으로 들어서 있는데 모두 정선의 토속음식을 맛볼 수 있다. 백복령주막촌은 단순히 먹거리를 판매하는 장소가 아니라 이야기가 있는 주막촌으로 특이하게 번호로 주막이름을 매겨 운영하고 있다. 이제 18개 주막촌의 스토리를 소개하고자 한다. 

- 향토1호 권혜숙씨

혜숙씨도 엄마의 손맛을 물려받았다. 뿐만 아니라 일선에서 물러나신 엄마의 식당도 물려받았다. 엄마의 홍두깨와 안반도 혜숙씨의 차지가 됐다. 엄마는 음식 솜씨가 좋았다. 젊어서도 잠시도 일손을 놓지 않았다. 집에서 콩을 갈아 두부를 만들어 팔기도 했고, 혜숙씨가 기억하는 한 엄마는 항상 뭔가를 만들었다. 어린 혜숙도 그런 엄마의 주변에서 늘 맴돌았다. 두부를 만들 때는 옆에서 거들기도 했고, 안반을 펴고 국수를 밀 때는 특히 곁에 꼭 붙어 앉아 지켜봤다. 동그랗던 반죽이 안반 위에서 홍두깨에 밀려 얇게 펴지는 모습이 신기했다. 반죽이 국수가닥만큼 얇은 두께로 펴지면 길게 반으로 접고 또 접는다. 접은 넓이가 손 안에 잡히면 칼로 국수가닥을 썰어낸다. 그리고 국수를 다 썰고 마지막 남은 꼬리부분은 혜숙씨 몫이 된다. 이게 여태 지키며 기다린 진짜 이유다. 국수꼬리는 국수반죽을 밀어 칼로 썰다 마지막에 남는 얇은 꼬리부분이다. 그것을 숯불에 구우면 볼록하게 부풀어 오르며 바삭하게 익는다. 별 맛이 없으면서도 담백하고 고소하다. 별 맛이 없기에 진짜 별맛이었던 그것이 혜숙씨는 세상 어떤 과자 보다도 맛있었다. 그래서 향토의 맛은 어쩌면 추억이 낳은 그리움의 맛인지도 모른다. 

-향토 2호 전순연씨

순연씨가 가장 힘들 때는 언제였을까. 순연씨는 아들들에게 가장 미안하다. 사는 일이 자식들을 위해서라고 핑계를 대면서도 정작 필요할 땐 아이들 곁에 있어주지 못했다. 아침에 먹을거리를 챙겨놓고 나와 종일 일하다 밤늦게 들어가면 아이들은 먹지도 않고 굶어서 잠이 들곤 했다. 자식들 위해 벌겠다고 그것도 음식장사를 하면서도 내 아들들은 굶겨야 하다니 속이 상하고 아팠다. 돌볼 사람이 없어 그러려니 하고 여름방학 때는 할머니 댁에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애들을 씻기지도 않고 제멋대로 둔데다 모기에 물어 뜯겨 더 형편이 없어지곤 했다. 그렇게 저희끼리 훌쩍 커 어른이 다 된 아들들을 보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벌어먹고 사느라 아들 둘 다 군대 갔다 제대했어도 면회도 한번 못 갔어요."
순연씨는 아들들에게는 못해준 미안한 마음으로 음식을 만든다. 봄이면 냉이, 여름이면 애호박 등으로 계절의 맛을 보태기도 하지만, 대개는 즉석에서 간 생감자 본연의 맛으로만 전을 부치고 옹심이를 만든다. 비결 같은 건 없다. 감자옹심이와 메밀칼국수는 멸치육수에 소금으로 간을 하고 갓김치와 김과 깨소금으로 고명을 얹는 게 다다. 처음 마음 그대로 남들이 하는데로 한다곤 하지만, 그 맛에 단골이 됐다며 30년 가까이 찾아오는 손님들이 있는 한, 옛날의 주막집에서 그랬던 것처럼 순연씨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길손들을 맞을 것이다. 

-향토 3호 전대순씨  

진주가 고향이지만 부산에서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첫 딸을 낳았다. 하지만 가진 것이 없이 도시에서 자리 잡기란 쉽지 않았다. 고민 끝에 남편의 고향인 임계로 돌아오기로 했다. 고향에서라면 빈손이어도 젊음이 있으니 무슨 일을 못할까 싶었다. 남의 밭에 소작을 붙이며 산골생활을 시작했다. 농사라고는 처음이었지만 남편과 함께라면 뭐라도 두렵지 않았다. 아들이 태어났고 산골의 살림살이도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는 듯했다. 희망이 생겼다. 당장은 아등바등 고단해도 열심히 일하다보면 네 식구의 앞날은 행복해도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느닷없이 남편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말핬다. 하늘이 무너지고 세상이 캄캄했다. 사방이 절벽이고 낭떠러지였다. 온 세상 슬픔을 혼자 떠안은 것만 같았다. 망망한 대해에 의지할 데 없는 세 식구만 떠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한없이 주저앉아 슬퍼할 수만은 없었다. 살아야 했다. 죽을힘을 다해 강해져야 했다. 불의에 남편을 잃은 아내보다 먼저 품속에 아이를 안은 엄마였기 때문이다. 안해본 일이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했다. 한우직판장에서 고기 다듬는 일을 할 땐 칼질이 서툴러 날마다 손을 베곤 했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들이 앞에서 약해지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힘든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종일 서서 일하고 나면 다리가 퉁퉁 부었다. 잠결에도 끙끙 앓는 소리가 절로 새나왔다. 그렇게 일해도 딸아이가 원하는 외지 유학을 보내줄 수 없었을 땐 이불을 쓰고 소리죽여 울기도 많이 울었다. 엄마가 아무리 씩씩해 보이려 해도 힘들다는 걸 아는지 어린 아들은 그 작은 손으로 다리를 주물러 주기도 했다.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아이들은 건강하고 착하게 잘 자라주었다. 둘다 공부를 잘했고, 장학금으로 엄마의 아픈 마음의 짐을 덜어주었다. 향토음식점을 인수하여 생활이 안정된 후로는 언제나 웃는 얼굴로 씩씩하게 살려고 했다. '방실이'도 손님들이 붙여 준 별명이다. 
"조금만 부지런하면 여기선 모든 게 식재료가 돼요."
이렇게 말하며 대순씨는 동그랗게 웃었다. 봄에 피는 노란민들레 같다. 누가 알았을까. 따뜻한 남쪽 바다처럼 넓은 세상만 있을 줄 알았던 진주 아가씨가 강원도 높은 산골짝 오지에서 평생을 살게 될 줄을. 

-향토 4호 전수희씨 

수희씨 역시 정선토속음식을 만드는 일에는 서툴렀다. 전병도 처음이었고 메밀국수도 처음이었다. 메밀음식은 다른 음식에 비해 반죽이 가장 중요하다. 메밀은 밀가루와는 달라서 점성이 부족하고 투박하기 때문이다. 반죽이 조금만 눅어도 국수는 끓다가 풀어져버리고 전병은 옆구리가 터지는 '불상사'가 생기고 만다. 더구나 기다리는 손님을 두고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그 당황스러움이란 겪어보지 않고는 절대 알 수 없는 비극이다. 크기도 어떻게 해야 알맞을지 감이 오지 않았다. 전병을 말아놓으면 너무 커서 접시에 다 담기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래도 모자라는 것보다 남는 게 나았다. 무조건 푸짐하고 크게 만들었다. 수희씨만의 음식상품이 탄생했다. 바로 수수부꾸미다. 직접 농사지은 수수와 팥이 어우러진 담백하고 고유한 맛이 일품이다. 
"수수부꾸미를 남들처럼 여러 개로 부치지 않고 하나로 크게 만들어요. 여기서 나만 그렇게 해요. 한 5년 하다보니 이제는 베테랑이 다 됐어요."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살겠어요. 죽으면 한 줌밖에 안 되는게 인생인데."
수희씨는 이곳에서의 삶이 좋다. 이곳에서 마주치는 자연이 좋고, 이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좋다. 먹을 게 생기면 얇은 칸막이로 대신한 벽을 통통 치기만 하면 된다. 너와 내가 아닌 우리가, 한 가족처럼 마음을 나누는 일상이 소풍인 이유다. 

-향토 5호 고철순씨

음식점을 시작할 때 막둥이가 겨우 네 살이었다. 아이들만 집에 두고 온중일 나와서 장사를 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가뜩이나 서툰데 아이는 잠시라도 쉴세라 전화번호를 눌러 엄마를 불렀다. 초기에는 실수도 많았다. 한번은 중년의 부부가 들어와 메밀칼국수를 주문했다. 다른 손님들도 많아 정신이 없었다. 반죽이 눅었는지 삶은 면발이 꼬들거리지 않고 늘어졌다. 다시 하기에는 밀린 손님이 너무 많았다. 그대로 가지고 나가 양해를 구했다. 조금만 기다리면 다시 해드리겠다고 했다. 몇 번 젓가락질을 하던 남자손님이 화를 벌컥 했다. "이걸 먹으라고 주는 거요?" 면이 젓가락에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옆에서 그의 아내가 오히려 민망해 어쩔 줄 몰라했다. 다시 해드린다는 데도 "그걸 언제 또 기다리냐"며 막무가내였다. 아직 초창기라 오기가 치밀었다. "그럼 손님에게 국수 팔지 않을 게요." 철순씨는 국수그릇을 집어 들고 돌아섰다. 다시는 안 올 거라 생각했다. 그들은 지금까지 20년지기 단골손님이 됐다. 
"국수그릇을 뺏겼으니 얼마나 황당했겠어요. 빈 젓가락만 들고 멍하니 쳐다보던 표정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요." 
돌아보면 부족하게 살았어도 그렇게 정신없이 살던 때가 좋았다. 물론 지금도 안정적인 일상을 누리며 나름대로 즐겁고 좋다. 그래도 감자 옥수수 삶아놓고 한 그릇에 둘러앉아 먹던 그때가 행복했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낮에는 죽도록 힘들어도 저녁에 집에 돌아가 아이들 얼굴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하루의 스트레스는 거짓말처럼 풀리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면 온몸이 가뿐해지곤 했다. 이제는 자식들도 다들 자라서, 어릴 때 각자 당번을 맡아서 했던 것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몫을 성실하게 해내고 있다. 복닥거리던 세월이 꿈만 같다. 

-향토 6호 김문순씨

문순씨가 백복령에 향토음식점을 열게 된 배경도 남다르다. 거기엔 '우르과이라운드'로 대변하는 '농산물 수입 전면개방'에 맞선 농민들의 분노가 있었다. 1992년부터 시작된 농민시위는 협상이 끝난 1994년 4월, 'UR밀실협상 규탄 및 국회비준 저지를 위한 국민대회'가 서울을 비롯한 전국 11개 도시를 달궜다. 그때 정선지역에서는 문순씨 남편 김건영씨가 시위에 앞장섰다. 지난한 싸움이었다. 문순씨도 집안일 다 놔두고 날마다 현장에서 살았다. 그 결과 정선군수의 동의를 얻어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백복령 정상에서 농산물직판장을 개설하게 된다. 

-쉼터 1호 유광지 김정희 부부 

유광지 김정희씨 부부는 아직 도회지의 습성을 채 벗지 못한 백복령 삶의 새내기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했고, 한 대학교 교내에서 복사점(개인사업)을 운영했다. 오십대 초반인 그는 앞으로 10년까지만 사업을 하고, 그 후에는 복잡하지 않은 곳에 정착해 여유 있는 삶을 살고 싶었다. 뜻한 대로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아니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재계약의 벽에 부딪쳤고 경쟁에서 밀려났다. 딱히 납득할만한 문제도 없었다. 이유가 있다면 힘없는 '을'의 입장이라는 것뿐. 괴로웠지만 어쩔수 없었다. 고민 끝에 장기적인 계획을 앞당기기로 했다. 서울생활을 접고 정착지를 물색할 겸 그동안 쉬지 못했던 휴가를 떠났다. 백복령 정상에서 매점을 하는 친구를 찾아왔다가 이곳 자연에 반해 한 달을 머물렀다. 그때 빈 가게가 났다는 걸 알게 됐고 곧바로 마음을 정했다. 그렇게 둥지를 튼지 이제 사계절을 맞는다. 
'모든 인연에는 때가 있다'는 뜻의 '시절인연'처럼 우연인 듯 필연으로 다가오는 기회와 끌림 같은 것은 분명히 있는 듯하다. 
이곳에 찾아오는 손님들을 대하다보면, 타인을 배려하는 그들의 높은 의식수준에 부부는 매번 감탄한다. 직장생활 10년과 개인사업 10년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살았다. 대다수의 도시 생활인들이 그렇듯, 부부도 거의 이해관계로만 얽힌 각박한 도시의 생활에 지쳐있었다. 이제야 비로소 그동안 찾을 수 없었던 삶의 여유를 이곳에서 찾는다. 또한 만나는 모든 인연에 새로운 삶에 활기를 얻는다. 
백복령의 물과 바람은 마치 첫사랑과 같은 느낌이다. 깨끗하고 순수하거니와 때로는 강하게 휘몰아치는 열정적 감정을 동반하는 첫사랑. 부부는 서로에게 첫사랑이라고 했다. 백복령의 물과 바람에 그 첫사랑의 느낌을 얻는다. 숲과 자연 속에서의 매일이, 청량한 공기와 카르스트에 자생하는 야생화 같은 하루하루가 그들에게는 곧 힐링이다. 

-쉼터 2호 유영선씨

유영선씨는 열 벌이나 되는 시댁의 제사 덕분에 제사상에 진설할 전병을 조금씩 해볼 기회는 있었다. 그러나 상품으로써의 전병은 다른 일이었다. 오랜 단골손님들은 지금도 오면, '전병이 팔뚝만 해서 입에 들어가지도 않게 하더니 이젠 선수가 다됐다'며 농담을 하곤 한다. 그뿐 아니라 손님이 밀리면 반갑기보다 당황스럽고,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 정신이 없었다. 심지어 들어오는 손님이 무서워 제발 돌아가라고 속으로 주문을 외며 뒤꼍에 숨어있기도 했다. 
"그러면 먼저 와 있던 손님들이 '아줌마 손님 왔어요.' 소리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나와야죠 뭐." 
직업병이 생겼다. 음식을 즉석에서 만들어내는 일은 거의 중노동이다. 일을 너무 많이 해서 팔과 어깨, 허리나 손가락 발가락까지 안 아픈데가 없고, 염증으로 붓고 아파 수술을 해도 쉴틈이 없다. 20년 넘은 단골손님들은 그런 줄도 모르고 영선씨네를 친정처럼 생각하고 온다며 그만주디 말라고 한다. 그들과의 인연을 생각하면 건강하게 더 오래 해야 하는데 걱정이다. 
부부는 닮는다고 했다. 어떤 일도 혼자서는 힘든 게 세상 이치다. 향토음식점 운영도 부부가 협심하기에 가능했다. 겨울철 대표메뉴인 꿩만두도 부부가 밤새 빚는다. 소를 만들고, 피를 반죽하고, 밀어서 빚는 일까지 여간한 품으로는 해내기 힘든 일이다. 아무리 찾는 사람이 많아도 혼자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천생연분이란 이들을 두고 하는 말임에 틀림없었다. 부부는 그래서 더욱 닮아보였다.  

-쉼터 3호 장정남씨

단골들은 멀리서도 친척처럼 찾아온다. 그렇게 일부러 찾아온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그냥 단골이 아닌 '백년손님'처럼 반갑다. 그게 다 향수 같은 것은 아닐까. 어릴 때 엄마에게서 먹던 음식 같은것. 엄마가 해주던 음식만 먹다가 이모가 해주는 음식이 입맛에 안 맞는듯, 언제나 입에 맞는 집은 따로 있다. 단골들도 그런것 같다. 꼭 가는 집만 가려고 고집하는 이유가 그렇다. 옛날 같지는 않아도 요즘도 주말이면 손이 모자랄 만큼 찾아오는 손님이 많다. 그런 날은 몸이 고단해 다음날 죽어도 못 일어날 것 같아도 단골손님을 그냥 돌려보내게 될까봐 문을 닫지 못한다. 손님이 없어도 가게에 나와 쉬는 게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웬만하면 놀기도 하며 애쓰지 않고 살려고 한다. 용돈벌이 정도만 되면 단골손님들만 있어도 좋다. 
개업 초기에는 동해의 해군부대의 해군가족이 많이 찾아왔다. 주로 전라도와 진해에서 올라온 사람들이었다. 한번은 해군 가족들이 단체로 들렀다. 다들 평상복차림이라 처음엔 해군인지도 몰랐다. 자기들이 어떻고 어떻다고 자랑하듯 말하기에 정남씨도 "우리 집엔 텔런트도 왔다갔는데." 라고 자랑했다. 
한 사람이 옆을 가리키며 말했다. "텔런트보다 여기 더 높은 사람이 왔대요." 누군지도 모르는데 뭐라고 부르겠나. 아저씨라고 했다. "아저씨가 뭔데요?" 그러자 "별이에요." 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아이쿠야! 하고 놀랬더니 우습다고 막 웃더라고요." 
오지의 시골아낙이 가만히 앉아서 어떻게 '별'들을 만날까.
"영광이죠. 그래서 사인해 달라고하니 해 주더라고요." 
그들은 가장 오래된 단골이 되었다. 정년으로 퇴역하여 진해로 돌아간 후에도 일년에 적어도 서너 번씩은 찾아온다. 그들이 처음 왔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거의  고향으로 돌아갔고, 그때 따라와 눈밭에서 뒹굴던 꼬맹이들도 결혼하여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때로는 어른이 된 모습으로 새 식구를 데리고 찾아오기라고 하면, 가슴이 뭉클애지곤 한다. 그냥 단골손님이 아닌 백년손님인 까닭이다. 

-쉼터 5호 조금희씨 

그 숱한 인연들 중에도 손꼽히게 기억에 남는 사람들은 꼭 있다. 어느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손님이 많았고 여느 때보다 일찍 식재료가 떨어졌다. 종일 바빴던 탓에 몸은 녹초가 됐다. 금희씨는 일찍 문을 닫고 막 들어가 쉬려던 참이었다. 그때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년 둘이 젖은 모습으로 들어섰다. 
"밥 좀 먹을 수 있어요?" 
밥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밥이 꼭 먹고 싶다고 했다. 금희씨는 잠시 생각하고 돌아서서 주방에 불을 켰다. 그리고 새로 쌀을 씻어 밥을 지었다. 맛있게 밥을 먹고 난 그들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실은 보도여행 중인 대학생인데 돈이 다 떨어졌다고 했다. 먼저 말씀드려야 하는 줄 아는데, 그럼 밥을 못 얻어먹을 것 같아서 말을 못했다며 죄송하다고 했다. 당황스러웠다. 처음부터 솔직히 말해도 될 것을. 하지만 그들이 미리 말을 했다면, 어쩌면 하기 쉬운 국수는 삶아주었겠지만 새로 쌀을 씻어 밥을 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날따라 몹시 지쳐있었기 때문이다. 눈빛이 선하고 정직해 보였다. 문득 객지에서 유학하고 있는 아들 생각이 났다. 내 아들도 어디 가서 어떤 상황에 처할지 누가 알겠나. 괜찮다고 했다. 맛있게 잘 먹었으면 됐다고. 그리고 잊었다. 
일년 후 말쑥한 청년 둘이 찾아왔다. 이번엔 걸어서가 아니라 자동차를 타고 왔다. 꼭 갚으러 다시 오겠다며 떠났던 그 대학생들이었다. 
"곧 입대를 해요." 
군대 가기 전에 약속을 지키려고 일부러 왔다고 했다. 가슴이 뭉클했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날은 너무도 배가 고팠거든요. 이번에는 떳떳하게 주문하겠습니다. 맛있는 밥 좀 해주세요!" 
그날 못 낸 음식 값을 포함한 금액을 봉투에 넣어 내밀었다. 애당초 받을 생각이 없었다. 마음만 받겠다고 했다. 언제든 찾아와도 좋다고도 했다. 그들은 군대를 전역하고 취직을 한 후에 다시 또 찾아오겠다고 했다. 이번에는 몇 년 걸릴지는 모르지만 꼭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다. 금희씨는 그들이 약속을 꼭 지키리라는 걸 믿었다. 스치는 인연이 특별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잠시 왔다가 길을 떠났지만, 자기 앞에 놓인 생에 최선을 다할 것이고, 그러면 출싱한 삶은 그들에게 보답리란 것도 믿었다. 

-쉼터 6호 김옥선씨

"산골짝에 뭐가 좋다고 내발로 찾아왔겠어요, 신랑이 좋아서 왔지. 불을 뗄 줄 아나. 밥을 할 줄 아나. 애도 많이 먹었죠. 몇 십년 살다보니까 이젠 다 좋아요. 지금도 옛날 같다면 못살고 갔겠요. 뭐." 
철부지로 시집와서 시어머니에게 야단맞으며 배우고, 시누이에게 도움 받으며 배웠다. 그 재주로 자식들 뒷바라지 다하고 몇 십년째 음식장사로 먹고 산다며 옥선씨는 소리 내어 유쾌하게 웃었다. 
처음엔 얼떨결에 시작하게 된 터라 음식에 대해서도 잘 몰랐고 겁이 나기도 했다. 한꺼번에 손님이 몰려오면 당황해서 어떨 줄 몰라 이것저것 들었다 놨다 안절부절 하곤 했다. 그럼에도 아이들이 어렸을 땐 억지로라도 벌어야 했기 때문에 무작정 이리저리 부딪치며 서툰 일과 환경에 스스로를 맞추며 살았다. 열악한 환경도 살다보니 세상 어디보다 안락해졌다. 서툴렀던 일 솜씨도 자끄만 하다보니 몸에 배고 손에 익었다. 아무리 번거롭고 힘든 일도 쉽고 간편하게 해내게 됐다. 일한 세월만큼 단골손님도 많아졌다. 이제는 처음손님이라도 늘 만나는 이웃처럼 편하다. 
이제는 아등바등 조바심치지 않아도 괜찮다. 예전에 비하면 일부러라도 와서 살고 싶을 만큼 환경도 좋고 살기도 좋아졌다. 여름은 여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삶이 시원하고 또 따뜻해져서 좋다. 애들도 다 컸으니 큰돈 들어가는 일도 줄었다. 건강하기만 하면 언제까지라도 이곳에서 일하며 찾아오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고 싶다. 손님이 있으면 있어서 좋고 손님이 없으면 없는 대로 좋다. 이곳이 가장 편한 삶터이기 때문이다. 

-쉼터 7호 김주하씨

주하씨는 서울에서 음악공부를 했다. 원래는 무대 디자인을 공부하다 음악을 만났다. '모던록'에 매료됐다. 음악을 한다는 것은, 오랜 시간을 두고 경험을 통한 느낌을 예민하게 간직하는 게 중요했다. 하지만 서울에서의 각박한 삶은 정신적으로 많이 고단했다. 가장 힘들었던 건 무엇보다 잠을 충분히 자지 못했다. 피로가 쌓이고 생활에 균열이 갔다. 10여년 동안 애쓴 서울생활이 무력해져갔다. 재충전이 필요했다. 쉼터에서 향토음식점을 운영하는 부모님 곁으로 돌아왔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모님 고생을 보고 자랐다. 어머니와 이웃들께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이 있을 것 같았다. 주변에는 토속음식점 뿐이라, 누구든지 편하게 앉아 담소할 수 있는 안락한 장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식당을 옆쪽으로 옮기고 내어준 공간에다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정성껏 카페를 꾸몄다. 누구나 여기에서 세상의 시끄러움 다 떨쳐버리고 달콤하고 깊은 잠처럼 쉴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꽃잠'이라 이름 했다. 

-쉼터 8호 안봉래 김명자씨 부부 

안봉래씨 부부는 백복령 식당에서 상주를 한다. 이곳에서 주인이 상주하는 곳은 1호점과 8호점뿐이다. 여량이 고향인 부부는 오래전에 이곳에서 살려고 했다. 그래서 공기 좋은 곳에 와서 식당을 해보자고 가게를 샀다. 하지만 여러 사정으로 하지 못하고 세를 놓고 강릉 바닷가에 내려가 떡집을 하며 살았다. 그러다 돌아온 지 이제 3년째다. 많은 세월을 건너 마침내 돌아온 보금자리다. 조금 늦긴 했지만 그래도 아주 늦지는 않았다. 
막상 돌아왔지만 가게는 개업한 이래도 한번도 치우지 않았던 것처럼 썩고 망가지고 엉망이었다.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엄무가 나지 않았다. 지붕과 외벽만 남기고 싹 다 뜯어내고 리모델링했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의 터전이 될 문을 열었다. 기존의 단골은 아예 없었다. 세를 들었던 사람은 워낙에 장사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했다. 이웃들이 먼저 알려주었다. 이미지를 회복하자면 많이 힘들 거라고. 정상적으로 바꿔놓기까지 일 년여 동안의 정성이 필요했다. 지금은 단골손님도 많이 생겼다. 특히 감자옹심이와 메밀칼국수를 끓여내는 육수가 맛있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비법 같은게 따로 있지는 않다. 자연의 재료를 가지고 남들처럼 끓여내도 손님들의 입맛에는 특별한 모양이었다. 집 밥 같은 엄마의 손맛, 오랜 세월 경험으로 익한 엄마만의 레시피, 딱 꼬집어 말할 수 없어도 절로 알아지는 고향의 맛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쉼터 9호 이미옥씨

정선은 감자의 고장이다. 고랭지 임계 감자는 특히 저장성도 좋고 맛이 있다. 향토음식에 감자 음식이 빠지지 않는 이유다. 생감자는 갈아서 눠두면 산화하는 효소가 작용하여 갈변현상이 생긴다. 그런 상태가 된 감자로 음식을 만들면 연한 푸른빛을 띤다. 향토식당에서는 즉석에서 바로 갈아 감자전을 부치고 감자옹심이를 만든다. 그래야 하얗고 노릇하게 익어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울 뿐만 아니라, 순수한 감자의 쫀득한 식감이 살아있는 감자부침이 된다. 여러가지 메뉴를 시켜도 가장 먼저 감자전이 나가는 것도 다 그 때문이다. 백복령에서는 모든 집이 감자전에 다른 부재료를 거의 섞지 않는다. 미옥씨도 늘 하던 대로 감자를 넉넉하게 갈아서 전을 부쳐 주문한 손님에게 가져갔다. 그때 그가 휙하고 한 마디 던졌다. 
"아줌아, 여기다 밀가루 섞었죠!"
느닷없이 돌팔매에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기가 막히고 억울했다. 속이 상하고 말문이 막혔다. 음식 투정이라면 접시를 뺏어야 하나, 두번이라도 만났던 손님이라면 그렇게라도 맞대응했을텐데. 하지만 바쁜 와중이라 다른 손님부터 맞느라 잠시 잊었다. 한 숨 돌리고 나서 돌아보니 어느새 그는 남김없이 다 먹고 가버린 후였다. 
많은 세월이 부딪히며 지났다. 매사에 꺼끌꺼끌 거칠게 일어나던 성질의 모서리들이 이리저리 갈기고 닿아서 뭉툭해지고 유연해졌다. 세상에 어디 꼭 두 가지 유형의 사람만 있겠나. 그래도 분명한 건, 찾아오는 손님은 모두 미옥씨의 음식을 맛있게 먹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다. 그거면 충분했다. 그래서 미옥씨는 일에 익숙해진 요즘도, 바쁜 시간이면 손이 모자라 늦어도, 기다려주는 손님들이 고맙고, 그들과 나눌 수 있는 지금이 날마나 새롭고 즐겁다. 

-쉼터 10호 홍순옥씨

17년 전이다. 순옥씨는 동해에서 식당을 운영하다 접고 잠시 쉬고 있었다. 그때 일솜씨는 놀리는게 아니라며 친구가 자신의 가게를 해보라고 권했다. 애당초 욕심 따위는 없었다. 산꼭대기에서 장사가 되면 얼마나 될까. 따지지도 값을 매기지도 않았다. 그저 하루 5만원 벌면 5만원만 먹고 살면 되지, 하는 마음이었다. 백복령에서의 삶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백복령에서 동해까지는 자동차로 40분 거리밖에 안된다. 그런데도 바닷가와 산지라는 지형적 특성 때문인지 음식 문화는 전혀 다르다. 전병에 갓김치를 넣는 것도 순옥씨는 이곳에 와서 처음알았다. 동해에는 김장에 양념으로 쓰는 갓 말고는 정선갓이 따로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지금도 많다. 지역적으로 아무리 가까워도 정서가 다르고 문화가 다른 데서 부딪치는 배타와 이질감은 자주 상처가 되었다. 처음엔 극복이 안되어 마음 둘 곳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쌓여가면서 차츰 자연은 상처를 치유했고 바람은 우울을 씻어낸다. 
17년이 지났다. 순옥씨는 점차 백복령의 정서에 스며들었고, 토속음식의 맛은 순옥씨의 손맛에 배어들었다. 따라서 정선의 향토음식 맛은 순옥씨의 손맛이 되고 손님의 입맛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먼데서 다녀간 손님으로부터 그 지방 문화회관에서 정선향토음식을 소개해 달라는 요청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건 순옥씨의 삶에서 벗어났다. 한 사람이든 두 사람이든 찾아오는 손님을 위해 성심껏 음식을 만들고, 그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에 족하면 그뿐. 

-쉼터 11호 김영순씨

산나물이 나기 시작하는 4월이 오면, 시어머니는 커다란 자루를 챙겨들고, 이름 아침 집을 나서며 어린 며느리에게 눈짓과 몸짓으로 당부를 한다. 
"저녁 때 넘어가는 해가 '요만큼' 남으면 가마솥에 불을 때서 물을 끓여 놓아라." 
시어머니가 가르쳐준 대로 서산에 해가 한 발쯤 남으면 영선씨는 가마솥에 물을 끓여 놓고 마중을 나간다. 시어머니는 종일 고비나물을 가마니 가득 채워 두 개씩 뜯어 놓고 기다린다. 집에 돌아오면 바로 끓는 물에 데쳐 밤새도록 하나하나 손으로 비벼가며 훑어서 널어야 일은 끝이 난다. 시어머니는 그렇게 어린 며느리에게 말이 아닌 동작으로 세심하게 일을 도우며 가르쳤다. 소통의 언니는 달라도 두 어른은 누구보다 정이 많고 다정했다. 소통은 말로만 가능한게 아니었다. 영선씨는 시부모님을 보면서 저렇게도 다정하게 살 수 있는데, 말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은 왜 싸우고 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랬지만 시부모님을 오래 모시지는 못했다. 시아버지는 신혼 초에 돌아가시고 시어머니는 5년 후에 돌아가셨다. 
손님이 많을 때는 더욱 시어머니가 생각난다. 살아계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비록 말은 남들처럼 주고받지 못했어도 한없이 따뜻하고 다정했던 어머니가 지금도 항상 그립다. 
농사 뒷바라지를 하면서 장사를 하려니 손님이 밀려들 때는 정신없이 바쁘고 힘든 건 사실이다. 어떨 땐 너무 힘들어 다른 집으로 가시라 권해도 해지기 전에는 해주지 않겠냐며 기다리는 손님은 이제 손님이 아니라 가족 같다. 식사를 하고 난 상도 다 치워주고 가는 손님이 적지 않다. 어쩌면 단골이란, 이해관계를 떠는 인정으로 더 끈끈하게 얽힌 관계가 아닐지. 그래서 그들을 위해서라도, 그 기다림이 고맙고 미안해서 설령 그만두고 싶어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그만두지 못할 것 같다며 영선씨는 환하게 웃었다. 

-쉼터 12호 박옥경씨 

농사일만 거들며 살았다. 그러다보니 친구를 사귈 기회도 없었고, 마음을 터놓고 지낼만한 사람도 없었다. 만나는 사람이라야 늘 한정돼 있었다. 밭에서 작업을 같이 하거나 오며가며 만나는 동네사람들 뿐이었다. 그러다 쉼터에서 동업을 하게 됐다. 임계에서 40년 가까이 살면서 백복령에는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이웃들도 처음 사귀었다. 날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즐겁고 재미있었다. 살면서 몇 번씩은 겪게 되는 일련의 관계들이 낯설다가 익숙해졌다가를 반복하면서 새로운 인연들이 생겼다. 장사가 처음이라 모든 게 서툴렀지만, 처음부터 뭐든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부딪치면서 겪고 배우는 거지, 했다. 그래서 어떤 일이든 진심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밖에 할 줄 몰랐다. 
"여기서 장사를 오래 하다보니 사람들은 다 내 맘 같지 않구나, 느끼죠. 그래서 내 좀 불편해도 서로의 관계가 불편해 질까봐 민감한 부분은 건들지 않으려고 해요. 우리는 성격 자체가 색깔이 없잖아요. 나를 내세울 일도 없고 목소리를 키울 일도 없죠." 
옥경씨는 마음이 잘 안 풀리면 초심으로 돌아간다. 내가 무슨 마음으로 여기까지 살아왔는지를 생각하면 서운했던 마음도 조금씩 풀린다. 사람의 인연이란 게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게 될지 어떻게 알겠나. 뽀족하게 색깔을 드러내어 아옹다옹 다투며 사는 것보다 차라리 바보 같다는 소리를 들어도 무색무취로 사는 게 더 낫지 싶다. 마음의 부침도 겪지만, 상대가 누구든 나와 다르다는 걸 인정하고 나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이해하게 된다. 때때로 힘들고 아프고 서러워도, 마음으로 다가서고 진심으로 대하는 것만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따뜻히게 하는 건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쉼터 13호 임금옥씨

참 많이도 속울음을 울었다. 그럴수록 내색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만큼 사람을 단단해지게 하는 것도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입맛은 사람의 생김생김만큼이나 다양하다. 그 모든 입맛을 맞추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란 것도 숱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배웠다. 매일의 일은 연습이 아닌 실전이었다. 
문제는 간이었다. 정성껏 만들었지만 무엇에 마음을 빼앗겼던지 음식에 같이 하나도 안 돼 있었다. 맛에서 가장 중요한 건 '간'이지만, 간은 공기와도 같아서 얼핏 뒷전으로 밀려나기 십상이란 걸 미처 염두에 두지 못했다. 
음식뿐 아니라 삶에도 '간'이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 때로는 고소하고 달콤한 양념도 필요하겠지만, 너무 짜거나 싱겁지 않게 살아가는 일, 그래서 상처가 너무 덧나거나 아물어야 할 때를 놓쳐버리는 일이 없도록 살피는 것도 삶이라고 여겨진다. 금옥씨에게 손님은 모두 스승이다. 때로는 서운하고 억울해도 돌이켜보면 찾아오는 모든 분들에게서 사람을 배우고 삶을 배운다.